노시인의 그림
<술 없이도 취하는 고은의 그림세계>
9월4일 서울 중구 순화동 중앙일보 빌딩 1층 국제교류재단 문화센터에서 시인 고은 등단 50주년 기념 그림전 <동사를 그리다>(사진)가 개막했다. 고은 시인이 직접 그린 그림 35점과 글씨 19점 등을 선보이는 이 전시회를 기념하는 부대 행사로 각국 대사들이 주축이 된 ‘주한 외교 사절단 고은 시 낭송회’(9월10일 오후 5시)와 고은의 시를 노래로 만든 ‘북밴’의 문학 공연이 예정되어 추석을 앞둔 사람들에게 사유의 깊이를 더해줄 것으로 보인다. 고은 시인은 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할 때까지 미술반에서 활동하며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6·25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화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그의 ‘묵은 꿈’이기도 한 그림들에서 ‘동사’처럼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2년 후에는 작업실을 마련해 본격적으로 유화를 그리고 싶다는 시인이기에 그림에도 열정이 그대로 각인된 듯하다. ‘술 없이도 취할 수 있는 세계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평소 말해왔다는 고은 시인. 그의 그림전에 그 세계가 언뜻 엿보였다. 9월12일까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시사저널에서 가져옴.
<고은, 일흔 다섯 노시인의 화가선언>
"눈부신 날이다. 그림은 소년시절 수채화를 끝으로 접은 뒤 58년만이다. 이제 절망을 잠시 밀쳐두고 붓질을 시작하려 한다. 그림이 완성되고 전시되기까지 도움을 준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의 공덕에 몸둘 바를 모르겠다. 앞으론 유채 작업을 본격적으로 하려 한다. 삶의 후기는 다른 삶의 전기다. 그러니, 그림 또한 내 삶의 일부로 기록될 것이다. 나는 그 무엇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을 것이다."
일흔 다섯 노시인이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말을 전하자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 사이에서 박수가 터졌다.
지난 9월 4일 오후 5시 30분 서울 중구 순화동 한국국제교류재단 문화센터에서 열린 '고은 문학 50주년 기념 그림전 - 동사를 그리다' 개막식에는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과 민주당 정세균, 원혜영 의원,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다산연구가 박석무, 염무웅 전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 화가 김용태, 김정헌 등 각계각층의 인사들 200여명의 모여 '화가로서 첫발을 뗀' 고은 시인의 앞길에 축하의 말을 던졌다. 하객 가운덴 주한 스웨덴 대사와 멕시코 대사 등 외국인도 십여 명 넘게 포함돼 있었다.
'동사를 그리다'란 근사한 부제가 붙은 이번 전시회엔 고은 시인이 직접 쓰고 그린 글씨와 그림 수십 여 점이 촘촘히 전시됐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다니던 학교를 그만둘 때까지 고 시인은 빼어난 미술적 재능을 지닌 학생이었다.
하지만, 전쟁은 화가를 꿈꾸던 소년의 미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러나, 그 어두움도 시인이 품었던 유년의 꿈을 깨뜨리지 못했다. 자그마치 일흔을 넘기고서야 '생소한' 화가의 길로 다시 들어선 고은. 그는 미술이라는 장르에서도 문학에서 이룬 것 같은 웅장한 자취를 남길 수 있을까.
문학에서 그림으로... 장르를 뛰어넘는 큰 발걸음
'초보화가 고은'이 아닌 '시인 고은'은 사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유명인사다. 요즘 세대들 표현으로 '필 받으면' 하룻밤에 10편의 시를 쓰기도 한다는 그는 스물 다섯에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해, <시여 날아가라> <어느 바람> <백두산> <만인보> 등 100여권에 가까운 시집을 출간했고, 소설, 산문, 평론을 아우르는 문학 전분야에서 빛나는 성과를 이뤄냈다.
그의 저서는 영어는 물론, 독일어와 프랑스어 등 10여 개 언어로 번역돼 외국에도 여러 차례 소개됐으며, 많은 이들이 이미 알고 있듯 지난 몇 년간 꾸준히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에도 올랐다. 이러한 문학적 업적을 염두에 둔 듯 일각에서는 고은을 '최고의 민족시인' 혹은 '한국의 대표시인'으로 칭하며 존경을 표하기도 한다.
이처럼 한 분야에서 누구도 감히 넘보기 힘든 일가를 이룬 사람이 늦은 나이에 왜 생경하고 생소한 '다른 길(화가)'을 가고자 했을까? 그건 아마도 안주하는 것을 누구보다 싫어하는 시인의 성격 탓이 아닐까싶다. 생의 후반기로 불리는 칠십대에 이르렀지만 고은의 가슴 안엔 아직 열여덟 청년이 붉은 숨결 내뿜으며 살아 있다는 말.
그렇다면 그가 시를 통해 가닿은 탁월한 세계해석과 인간에 대한 긍휼이 그림을 통해서도 보여질 수 있을까.
이번에 전시된 그림의 해설을 쓴 소설가 정도상은 "(고은의 작품은) 곧 닥칠 움직임 또는, 움직이지 않는 것의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며 '동사를 그리다'란 말로 선배 문인의 그림을 정의했다. 그 정의는 곧 전시회의 부제가 됐다. 이에 더해 정도상의 견해에 덧붙일만한 전문가의 해설이 전시회 팸플릿에 실렸다. 아래 인용한다.
"시인의 그림은 자연과 영혼의 원형을 투사하고 있으며, 고정된 형체의 허구보다 변하는 세계의 진실을 쫓아간다. 겹겹이 중첩되지 않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처럼 개념화를 거부하면서도 싸구려 낭만에 기대는 키치와도 멀리 있다.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를 흉내내지 않고, 오롯이 고은 자신이기를 원하는 열정의 소신들을 보는 기쁨이 크다."
시가 아닌 그림으로는 어떤 평가를 받을지...
시인이 자처해 던진 주사위는 이제 바닥에 내려앉았다. 그가 조심스럽게 때론, 과감하게 토해놓은 결과물(그림)이 사람들 앞에 놓여진 것이다. 이것들이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 주목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전시회를 돌아본 기자의 견해는 어떠냐고? 예술이란 만 사람이 만 개의 눈으로 보기에 만 가지의 해석이 가능한 것. 굳이 설익은 개인의 견해를 말하진 않겠다. 다만 독자 여러분의 판단을 돕기 위해 위에 각각 두 점의 글씨와 그림을 올리는 것으로 '전달자'의 역할만을 하려한다.
그리고, 하나 더. 조그마한 소품에서부터 3m에 육박하는 큰 그림 그리고, 고은의 글씨까지를 확인해볼 수 있는 '고은 문학 50년 기념 그림전 - 동사를 그리다'는 오는 12일까지 계속된다. 이와 더불어 10일엔 주한 외교사절단이 대거 참여하는 '고은 시 낭송회'가 열리고(한국국제교류재단 문화센터), 8일엔 중앙대학교 아트센터에서 '고은 문학 심포지엄'이 개최된다. -오마이 뉴스에서 가져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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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시인이 그림을 그렸다.
삶의 후기는 다른 삶의 전기다. 그러니, 그림 또한 내 삶의 일부로 기록될 것이다.
내 삶의 후기에 나 또한 저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